생각

산에 호랑이가 산다면

큰달팽이 2010. 1. 13. 15:22

‘1979년 12·12사태’로 정국이 뒤숭숭하던 1980년 1월24일 석간 <동아일보> 사회면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산 호랑이가 나타났다-57년 만에 경북 산속서 등산객 촬영’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서울에서 의상실을 하는 한 남자가 친구와 경주 부근 대덕산에서 등산을 하다가 절벽 위에서 한국산 호랑이 컬러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반세기만의 진객 백수의 왕’이란 제목이 달린 사진엔 호랑이의 “늠름한” 모습이 또렷했다.

 

 

산림청은 혹시 이 호랑이가 밀렵꾼에게 당할까 봐 긴급 보호조처에 나서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낭보는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코미디로 드러났다. 서울대공원의 벵골호랑이를 찍은 것임을 대공원 직원과 동물학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동아일보 오보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행

그런데 이런 해프닝의 전말을 모르는 한 여행 가이드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한국호랑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 이야기는 마침내 일본의 동물작가인 엔도 키미오한테 전달됐다. <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을까>(엔도 키미오 지음·이은옥 옮김/한국학술정보/1만5천원)는 한국 유력지의 오보를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 뒤 여러 해에 걸쳐 한국호랑이 관계자를 만나고 자료를 뒤진 엔도 키미오의 취재기록을 담은 르포이다.


» 경주 대덕산에서 호랑이에게 습격당한 고 김유근씨(1980년 당시 84세). 엔도 키미오 제공
호랑이는 단군 신화에서부터 등장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동물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 조상은 이런 호랑이를 좋으면서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 우러러보았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의 상징이었던 호돌이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기아타이거스의 마스코트가 친숙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호랑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호랑이가 남한에서 사라진 사실쯤은 모두 알 테지만, 마지막 한국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잡혔으며,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언제, 무엇(누구) 때문인지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남한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호랑이의 표본은 어디에 있으며, 그 호랑이는 어떻게 잡혔고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잡힌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호랑이를 좋아하고 이용하려고만 했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알려고 하지 않은 언론인을 포함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길이 2·5m, 몸무게 153㎏ 확인…“일제의 무서운 폭력 사죄”

이 모든 일을 20여 년 전부터 묵묵히 한 이가 바로 일본인 엔도 키미오 일본야조회 명예회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호랑이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6년 출간된 이 책은 지은이가 1908년 전남 영광 불갑산에서 1908년 잡혀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박제로 남아있는 한국호랑이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호랑이를 집중 추적한다. 또 서울대 도서관과 남산 국립도서관의 옛 자료를 뒤져 일본 강점기 때 호랑이 포획 실태에 관한 귀중한 통계자료를 찾아낸다.

서툰 한국말과 친구인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에 기댄 그는 꼼꼼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 집요한 취재력으로 한국의 어떤 언론인도 해내지 못한 한국호랑이의 멸종사를 그려내고 있다.

상세한 포획기록이 남은 마지막 한국호랑이는 1921년 10월 경북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됐다. 지은이는 이 호랑이에게 물려 큰 부상을 입은 김유근(타계)씨 등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 호랑이도표
김씨와 다른 마을 청년 몇은 추석을 앞두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를 진 채로 정면에서 달려든 호랑이의 공격을 당했다. 지게가 부서질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김씨는 지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마침 일본 왕실의 귀족이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미야케 순사는 도로공사를 하던 조선인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산등성이로 쫓기던 호랑이는 목을 지키던 포수의 총탄 두 발에 거꾸러졌다. 길이 2.5m, 체중 153㎏의 큰 덩치였다. 호랑이 가죽은 일본 왕실에 헌상됐다. 당시 초등학생을 위한 일본말로 된 ‘국어교과서’에는 이 충성심 깊은 순사의 이야기가 실려있음이 확인됐다.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북돋기 위해 쓰인 것이다.

헌병 등 총동원, 호랑이 24 표범 136 곰 429 늑대 228 마리 사살

» 1908년께 전남 영광 불갑산에서 포획한 호랑이의 가죽을 들어보이는 목포 다다미 상인 하라구치 쇼지로와 그의 가족들. 엔도 키미오 제공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있는 한국호랑이 표본은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주민들에게 잡힌 것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창으로 찔러 죽인 주민들은 이 호랑이를 들쳐메고 며칠을 걸어 부유한 일본인 상인들이 많은 목포에 도착해 우여곡절 끝에 팔게 된다. 다다미 상인 쇼지로는 이 호랑이를 구입해 일본에서 박제한 뒤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다.

그가 서울대 등에서 발굴한 조선총독부의 각종 통계자료는 충격적이다. 일제는 주민이나 가축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 ‘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사업을 1910~1920년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펼쳤다. 피해 신고를 받으면 주민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사살하는 방식이었다.

<조선휘보>는 1915년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한반도 전체에서 8명, 1916년에는 일본인 1명 포함해 3명으로 기록했다. 일본인은 사냥하다 역습을 받아 사망했을 것이다. 1915년 늑대에 물려 죽은 사람이 113명으로, 호랑이나 표범보다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해수’를 구제하기 위해 1915년 경찰과 헌병 3321명, 사냥꾼 2320명, 몰이꾼 9만 1252명이 총 4220일 동안 동원됐고 호랑이 11마리를 죽였다. 그 밖에도 표범 41마리, 곰 261마리, 늑대 122마리 등이 잡혔다. 이듬해에도 4만여 명이 동원돼 호랑이 13마리, 표범 95마리, 곰 168마리, 늑대 106마리를 퇴치했다. 요즘이라면 한 마리가 나타나도 반가울 대형 포식동물이 해마다 수백 마리씩 사라진 것이다.

총독부 자료를 보면, 대덕산 호랑이가 죽은 뒤에도 남한의 호랑이는 계속 잡힌 것으로 나온다. 1924년 전라남도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포획됐다. 해마다 2~3명이 호랑이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도 나온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잡힌 호랑이는 8마리, 표범은 103마리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호랑이가 붙잡힌 곳은 모두 함경북도 등 북한이었다.

흥미로운 건, 남한에서의 호랑이 피해는 계속됐다는 것이다. 1936년 경북과 충북에서, 1942년엔 경남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보고돼, 이때까지도 남부지방에 호랑이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도 정2품 장수 두고 왕이 직접 챙기며 포획 독려

»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살아남은 시베리아호랑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말살한 책임은 일제에 있는 걸까.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이 책 기획편집 후기에서 “호랑이 절멸의 책임을 일제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이 결정타를 가했지만, 이미 호랑이 개체수는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을 편 조선시대 동안 급감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적었다.

지난 15일 열린 국제 학술대회 “호랑이의 삶, 인간의 삶”에서 김동진 한국교원대 교수는 조선은 성리학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호랑이를 적극적으로 포획하고 살상해 사람과 호랑이 사이의 생태적 균형이 무너졌다고 밝혀다. 조선 초기 논으로 개발된 저습지는 호랑이가 주로 살던 곳이어서 대규모 호환이 일어났고, 백성 보호와 굶주림을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 체계적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적병을 베는 것에 버금가는 상을 내려 호랑이 사냥은 출세의 지름길이 됐고, 일정 수 이상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전국의 포호 성과를 국왕이 직접 챙겼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이 범에게는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착호갑사’라는 호랑이 포획 전문 병종을 만들고, 호랑이 포획활동을 전문적으로 지휘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해당하는 장수인 착호장을 두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또 포획기술의 개발과 보급에도 힘썼다. 조선 후기에 도입된 조총도 범의 포획을 가속했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호랑이에서 늑대로 교체됐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제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살아남은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이항 교수는 “호랑이와 전혀 무관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가 호랑이 보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은 없다”며 호랑이 보전을 위한 관심과 참여를 촉구했다.

 

호랑이 추정 발자국_1998년 2월 임순남 회장 일행이 발견한 대형 야생동물의 발자국.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포시 유달초등학교에 박제 형태로 전시되어 있는 호랑이는 생존지역과 연대가 확실하게 기록된 남한 최후의 호랑이다. 1908년 2월 영광군 불갑산 덫고개 기슭에서 농사꾼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사흘 밤낮을 발톱으로 벽을 긁으며 발버둥을 치다가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실은 일본인 모리타메조(경성제국대학교수)씨가 1928년에 저술한 ‘과학지식이’란 책 8권에서 ‘조선의 호랑이’편에 기술되어 있다.

 

 불갑산에서 포획된 호랑이는 일본인 하라구찌(原口庄次郞) 쇼지로씨가 당시 논 50마지기 값(200원)에 사들여 1910년 동경 시마쓰제작소에서 표본 박제해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한국호랑이의 박제와 운반·보관 등에 소요된 비용이 호랑이를 사들인 값과 맞먹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이 학교를 다니며 호랑이를 본 일본인 졸업생 30여명이 매년 이 호랑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치아 상태로 미루어 박제된 호랑이는 생후 약 5년에서 13년쯤 된 암컷으로 추정된다. 뒷머리의 황갈색 바탕에 검정색 줄무늬가 있어 왕(王)자가 선명한 전형적 한국호랑이의 특징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가슴 쪽에서 엉덩이까지 160㎝, 앞발 뒤꿈치에서 머리까지 95㎝ 남짓에 180㎏ 무게이다. 곰 발바닥처럼 뭉툭한 네발 사이사이에 나온 갈고리 발톱, 송곳처럼 날카로운 위아래 어금니 4개가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옛부터 권세․ 명예․ 승리 등을 상징하는 호랑이! 경인년(庚寅年) 호랑이해를 맞아 불갑산의 호랑이상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한 지역에서 잡혔던 한국산 야생 호랑이 중 유일하게 실체가 남아 있는 ‘호랑이 박제’를 모형으로 제작해 불갑산을 찾는 등산객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m 20cm의 서있는 모습의 입상 호랑이는 불갑사 일주문 앞에, 또 하나는 좌상의 절반 크기로 노적봉 자락 호랑이 동굴 앞에 배치했다.

 

 해발 518m의 영광 불갑산은 전남 서해안의 명산으로서 북으로는 태청산과 장성 백암산으로 이어져 호남정맥 백두대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군유산과 함평, 무안의 승달산을 거쳐 목포 유달산까지 이어지는 호암지역 영산기맥의 중심부에 위치한 명산이다.

 

 불갑산에 호랑이 조형물이 설치된 사연과 배경을 알아본다. 1908년 2월 불갑산에서 잡힌호랑이가 박제로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보관, 관리돼오고 있다. 영광군은 ‘2009년 영광 방문의 해’와 호랑이 생포 10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이어 2008년에도 불갑산에서 포획된 호랑이 박제가 전시되어 있는 목포유달초등학교와 박제의 ‘귀향’을 추진했다. 유달초교 동문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가자 대안으로 호랑이상을 제작했다. 환경부소속 국립생물자원관의 척추동물연구과 한상훈 박사팀의 자문을 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전시했다.

 

 

 목포유달초등학교의 최장군 교장은 박제호랑이 양보 제안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갑산 호랑이는 우리학교의 상징입니다. 기증자 후손들이 학교를 찾아오는 등 동문과 일반 관광객이 꾸준히 학교를 방문하여 한국호랑이를 관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내 놓아도 호랑이박제를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전남 목포시 유달초등학교 교무실 앞 복도에 놓인 호랑이는 비록 박제이긴 하지만 그 위용이 대단하다는 것이 한결같은 평가다. 공식적으로 남한에서 잡힌 호랑이 박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자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우리나라의 박물관과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자원관 등에 호랑이 표본 박제가 전시되어 있으나, 이는 동물원에서 사육하다 폐사된 호랑이를 표본 박제한 것들이다.

 

최후 남한호랑이 영광의 상징물로

 한반도에서 호랑이 살상은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는 제도적이었다. 호랑이 가죽을 나라에 바치는 ‘호피공납제’가 단적인 실례이다. 백두산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정기와 기상을 담고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은 호랑이가 휴전선 이남에서 사라진 것은 언제였을까?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휘보'의 지방별 자료에 따르면, 한국야생호랑이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1915~1942년까지 시행한 해수구제(害獸驅除)정책에 따라 남한에서는 1924년 전남지역에서 6마리가 잡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관찰되지 않고 있어 남한 호랑이는 전멸된 것으로 본다.

 

 비교적 체구가 작으면서 털이 두텁고 줄무늬가 선명한 한국산 호랑이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 유달초등학교의 박제 표본은 2008년 재일교포 3세가 박제 호랑이 표본을 기증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유일했다. 이 박제는 국립생물자원관에 전시중인 북한산 호랑이다. 박제의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가 불갑산 호랑이 박제는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남한 호랑이 박제가 됐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달초등의 박제 호랑이의 과학적 분석 결과는 매우 시사적이다. 그간 남한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와 동일한 종으로 추정만 됐을 뿐 학술적 뒷받침은 없었다. 지난 12월 17일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유달초등에 전시된 박제 호랑이의 젖가슴 살을 떼어내 계통 특성을 나타내는 1240개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단지 2개만이 시베리아 호랑이와 차이를 보였다. 멸종된 남한 호랑이가 시베리아 호랑이와 동일한 종이지만 일부 형질이 다른 사실이 최초로 확인돼 향후 복원사업과 계통 보전 등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포획연대와 지역이 확실하게 기재돼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는 불갑산 호랑이 박제의 영구 관리가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안타까움을 더해간다. 희소성과 학술 자료로서 뛰어난 가치 때문에 여러 기관에서 구애의 손길을 뻗치고 있지만 유달초등학교에서는 요지부동이다. 자치단체까지 나서 전문 인력이 있는 지역 내 박물관에 기증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고 있지만 학교 측은 상징물을 떠나보내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국내 유일의 한국산 호랑이 표본은 시간이 갈수록 털의 윤기나 검은 선도 일반 호랑이 박제보다 심하게 탈색되었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으로 털이 오그라들고 있어 이대로라면 표본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을까 우려된다. 재복원이 시급한 실정이다. /소정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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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호랑이는

 호랑이는 전 세계적으로 8개 아종이 있는데 우리나라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한반도 지역개체군으로 분류되며 시베리아 아종 가운데 몸집이 가장 작다. 독일학자 브라스는 1911년 "한국 호랑이는 중국 동북지역 호랑이보다 체구가 작지만 털이 두텁고 길며 몸의 색은 대홍색(帶紅色)으로 줄무늬가 매우 선명하고 폭이 넓다"고 묘사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400kg인데 비해 한국호랑이는 320kg 정도이다.

 

 한국호랑이가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증보문헌비고의 백제편으로, 시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2월에 다섯 마리 호랑이가 성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서기 545년 11월 백제에서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가져갔다고 최초로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한국호랑이는 일본 장수 무용담 경쟁으로 비화되어 수십 마리의 한국호랑이가 생포 또는 포살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큐슈지역의 한 영주집안에 임진왜란 당시 포획했던 한국호랑이의 박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한국 호랑이를 대표하는 백두산 호랑이의 특징으로 이마에 ‘임금 왕(王)’자 검은 줄무늬가 있어 권위와 위엄이 넘치는 표정과 밝게 빛나는 황갈색의 털․ 우람한 발과 강한 발톱 등은 한국의 기상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임신기간은 100일 내외로 1회에 3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6개월간 어미젖을 먹고 9개월이 되면 사냥연습에 몰두한다. 생후 5년이 경과되면 완전 성숙기를 맞는다. 물을 좋아해 헤엄도 잘 치며 경사 45도의 나무 위를 잘 오르며 그 육중한 몸으로 먹이를 찾아 하루 80∼100㎞를 이동한다. 100m를 5초에 단번에 질주하는 신속성을 지녔으며 멧돼지․ 들소․ 큰사슴 같은 큰 짐승을 앞발의 일격으로 목뼈를 부러뜨린 다음 아래위턱 어금니로 먹이의 숨통을 단번에 물어 끊는다. 200㎏ 됨직한 들소를 400m까지 쉽게 끌고 가는 괴력의 소유자이다

 

 


임 회장은 자비를 들여 러시아 호랑이 생태 연구가들을 찾아갔다. 근 3년을 왕래하며 호랑이 생태 조사방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남한 호랑이(고려범)를 찾는 일에 나섰다. 몇 개월씩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야영을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고 한다.
1998년 2월의 늦겨울, 임 회장은 강원도 화천에서 호랑이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대형 육식동물의 발자국이 분명했다. 전날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곳이었다. 능선을 거슬러 지나간 듯 수십 개의 발자국이 눈길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크기는 9cm이상이었다. 호랑이가 남한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사회를 들썩였다.

많은 언론들이 호랑이 목격담이나 출몰설이 있는 곳을 추적했지만 호랑이는 좀처럼 ‘살아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1년에는 대구MBC가 호랑이로 추정되었던 대형 야생동물을 무인카메라로 촬영하는데 성공했지만 조명 밖의 범위에 있어 그 모습은 흐릿했다. 영상을 확인한 전문가들은 호랑이가 아닌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임순남 회장은 남한에 호랑이가 지금도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지금도 목격담이 끊이질 않고 있고, 1998년에 발견한 발자국은 호랑이 것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표범은 아무리 성장해도 발자국이 9.5cm 이상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발견한 발자국은 9.5cm가 넘어요. 호랑이 발자국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죠.”임씨는 그것이 호랑이 발자국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대낮에도 차 몇 대 안다니는 길들이 많아요. 그런 길은 동물들을 위해서 그냥 뒀어야 하는 길들이죠. 지금 호랑이는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사람들과 공존하며 같이 사는 겁니다.”

2002 년에는 강원도에서 대형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추정되는 송아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송아지는 머리와 다리 일부만 남아 있었다. “하룻밤 사이 30kg을 하루에 먹을 수 있는 동물은 호랑이 밖에 없어요. 먹이가 줄어든 호랑이가 민가 주변까지 내려온 것입니다.”임 회장은 호랑이의 개체수를 늘이고 민가의 피해를 막으려면 수렵 허가를 제한해 호랑이의 먹이를 일정수준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한 번도 카메라에 호랑이를 담을 수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중국의 예를 들었다. “중국 훈춘 지역에 30여 마리의 야생 호랑이가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호랑이 전문가가 모여 그 호랑이를 한번 찍어보자 해서 카메라150대를 투입시켰어요. 그런데 2년 만에 한 마리 촬영에 성공했어요. 30마리가 넘게 있는 지역에서 말이죠.”실제 호랑이를 카메라에 담는 일은 쉽지 않다. 러시아 보호구역에 호랑이 생태 촬영을 위해 오는 방송팀이 호랑이 그림 한 컷을 위해 몇 개월을 눈밭에서 허비하는 일은 다반사다.


임 회장은 카메라 150대는 아니어도 장비만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강원도나 경기 북부 지역에서 충분히 호랑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비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부친다고 했다.

경 기도 원당에 자리 잡은 ‘타이거 캠프’의 얼룩무늬 컨테이너에서는 호랑이 탐사를 위한 장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날것처럼 거칠지만 지난 15년 여간 쌓은 노하우가 깃들어 있다. 적절한 시기가 되고 장비들이 완성되면 다시 탐사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20억 재산 날려 “국제 타이거클럽 만드는게 꿈”

“미국에는 ’독수리’, 러시아에는 ’곰’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8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산자락 아래 외딴집에서 만난 (사)한국호랑이보호협회 임순남(55) 소장은 한국호랑이 ’고려범’을 찾는 데 보낸 16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그가 국내에서 고려범의 존재를 찾기 시작한 것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송사에서 카메라맨으로 자연다큐멘터리를 주로 찍었던 그는 “강원도 평화의 댐 인근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된다”는 말에 촬영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호랑이 얘기만 나오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수개월동안 산속에서 지내며 미친듯이 호랑이 자취를 찾았다.
그러다 1998년 2월 평화의 댐 인근에서 발 크기 9.5㎝의 대형 암컷 호랑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장면을 목격한 뒤 호랑이에 푹 빠졌다.
그는 “우리 민족의 상징인 호랑이는 모두 고려범으로 불렸는데 일제시대 이후 북한에서는 조선범, 중국에서는 동북호, 시베리아에서는 아무르호랑이로 각각 불리게 됐다”고 호랑이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전국 명산에 철심을 박은 것처럼 일제가 우리의 강인한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정호군이라는 군대까지 만들어 100여마리 호랑이를 포획했는데, 그 이후 사람들이 호랑이가 없다고 믿게 됐다”고 일제 만행을 전했다.
그는 “그러나 현재 10여 마리가 국내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토종 호랑이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
호랑이 사랑 탓에 하던 일도 모두 그만두고 재산 20억여원도 거의 탕진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덧 해외에서 알아주는 호랑이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호랑이 관련 국제회의 참석은 물론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유명 해외 방송사와 다큐멘터리도 여러차례 찍었다.
그는 “처음엔 ’국내에 호랑이가 산다’고 하면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이제는 국민의 40% 정도가 호랑이의 존재를 믿고 있다”며 “호랑이를 국민들 가슴 속에 불어넣어 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호랑이의 해’인 내년 경인년(庚寅年) 새해를 맞는 게 그에겐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는 내년에 연천군과 함께 러시아 야생호랑이 몇 마리를 들여와 고대산평화체험특구에서 야생 상태로 키워 종을 보존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호랑이 관련 국제회의를 국내에서 개최하고 ’타이거 클럽(Tiger Club)’을 만들어 국제단체로 키우는 것도 그의 소망이다.

그는 “지금은 종의 전쟁이다”며 “호랑이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정신인 호랑이를 우리가 찾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라고 호랑이 사랑을 주문했다.


MBC 무인카메라에 포착, 호랑이 여부놓고 정밀조사중

2000년 3월 하순 소백산 중턱인 경북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 민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곳은 강원도 영월로 넘어가는 고치재 인근의 산간오지. 이해 3월 21일 밤11시께 이 마을 이장 유태근(40)씨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와 풍산개가 갑자기 낑낑거려 방문을 열었더니 생후 2개월된 풍산개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동안 건강한 개였고 죽은 몸 어디에도 상처하나 없었다.

그리고 6일 뒤인 27일 밤12시께 또다른 풍산개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 유씨의 노모(78)가 방문을 열자 개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넋이나간듯 방안을 몇바퀴 돌다 그 자리서 숨졌다.

함께 키우던 진돗개는 이날 밤 없어졌다. 죽은 풍산개는 방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겁에 질린 듯 입에서 침을 흘리며 신음하다 곧바로 죽었으며 앞서 죽은 새끼 처럼 외상도 전혀 없었다. 유씨의 노모는 “당시 방문을 열었을 때 붉은 빛을 띤 송아지만한 맹수가 산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호랑이 추정 맹수흔적 곳곳서 발견

같은 마을 주민들도 새벽이나 한밤중에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짐승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용맹하다는 풍산개가 겁에 질려 제풀에 죽고 진돗개가 없어지는가 하면 송아지만한 짐승 이야기가 퍼지면서 주민들은 ‘호환(虎患)’ 불안에 떨었다.

같은 해 4월에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신천마을 인근 밭에서 가로 6㎝,세로 7㎝ 크기의 짐승 발자국 20여개가 선명히 찍혀 있는 것이 주민에 의해 발견되는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 비슷한 크기의 발자국이 10여차례나 발견됐다.

한달여 뒤인 5월20일 강원 영월군 서면 쌍용리 산에서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40여개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특히 지난해 11월초 경북 예천군 상리면 도촌리 쌍학마을에서 맹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자형 발자국과 몸통 절반이 뜯긴 고라니가 발견됐다.

이보다 2개월전인 9월께 경북 영천에서 무게 30kg의 고라니가 물어뜯긴 채3m 나무위에서 발견되고 주위에 6cm크기의 파워패드(발톱으로 할퀸 자국)가 있었다. 무게가 30kg이나 되는 고라니를 3m 나무위로 끌고 올라갈수 있는 맹수는 호랑이와 표범 뿐이다.

이보다 2년전인 1998년 8월 경북 안동시 북후면 학가산 정상에서 등산객이 길이 2-3m, 키 1m가량 되는 호랑이로 추정되는 큰 산짐승을 목격했다고 신고했다.

또 강원 태백등지에서도 대형 짐승발자국이 발견되는 등 태백산맥 줄기를 중심으로 호랑이로 보이는 동물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그 같은 흔적들을 추적한 대구문화방송이 최근 경북 청송의 한 깊은 산속에서 그 동물을 촬영, 일부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한국호랑이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8월2일 화면과 함께 보도했다.

지난해부터 한국호랑이 생존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환경부는 전문가들로 호랑이 여부인지를 확인해봐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확인조사에 나섰다. 다른 전문가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살쾡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어 호랑이 논란이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러시아 전문가 “호랑이 가능성 높다”

대구문화방송(MBC)은 2일 "지난 6월22일 새벽3시44분 경북 청송군의 한 깊은 산속에 설치한 무인 센서 카메라(소니 TRV 20카메라, TM700V 센서)에 야생 호랑이가 찍혔다"고 보도했다.

문화방송측은 "촬영된 화면의 밝기 조절과 노이즈를 제거하는 필터링등 화면 개선작업을 거친 결과 왼쪽 앞발과 허벅지 안과 가슴, 배 등에 호랑이 특유의 줄무늬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으로 미뤄 야생 호랑이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촬영된 동물은 무인카메라에서 4.5m가량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의 조명이 켜지자 왼쪽 앞다리를 한 번 움직이고 고개를 들어 카메라 반대편을 1분 정도 쳐다본 뒤 사라졌다.

화면을 감정한 전문가들은 이 동물이 S자 모양의 긴 꼬리와 흰 뺨, 흰가슴, 뺨의 줄무늬 등이 선명하게 있으며 꼬리를 제외한 몸 길이가 120cm 정도인 것으로 미뤄 생후 24개월쯤 된 개체가 어미와 떨어져 자기 영역권을 찾아 다니다 카메라에 찍힌 것으로 추정했다.

특별취재팀에 참여한 야생동물연합 의장 한상훈 박사는 "카메라에 찍힌 동물의 모습에는 호랑이의 특성이 6가지나 있어 호랑이가 틀림 없다"고 말했다.

한국야생동물연구소장 한성용 박사는 "피사체가 비교적 어린 것으로 미뤄 주변에 최소한 어미와 아비, 형제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극동지역 연구소의 호랑이ㆍ표범 전문가도 방송 촬영화면을 검토한 결과 "주민들의 증언을 직접 듣지 못했고 화면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화면에 나타난 피사체의 특성과 촬영현장 여건으로 볼 때 어린 호랑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호랑이로 추정되는 동물이 촬영된 곳은 토끼와 담비, 고라니, 오소리등 각종 야생동물이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호랑이가 서식할 만큼 풍부한 먹이사슬이 형성된 곳이고, 93년과 97년, 2000년 등 3차례에 걸쳐 현지 주민들의 호랑이 목격담이 계속 있었다고 방송사측은 설명했다.

이번 호랑이일 가능성도 있는 동물을 촬영한 것은 지리산에서 야생 반달곰을 촬영한 이후 두번째 쾌거라 할 수 있다.


환경부 조사단 구성, 일부선 “틀림없다” 확신

환경부는 대구문화방송의 보도에 따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관계 전문가들로 조사단을 구성, 정밀조사에 나섰다.

조사단은 국립환경연구원 유병호 야생동물과장과 양병국 박사, 오창영 전서울대공원 동물부장, 교원대 김수일 교수, 우한정 한일야생생물연구소장, 한성용 한국야생동물연구소장, 권수완 삼성에버랜드동물원 차장, 한상훈 야생동물보호연합 상임대표 등 관련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됐다.

조사단은 3일부터 10일간 호랑이 촬영지역으로 알려진 곳의 호랑이 서식가능 여부, 출현 흔적 등을 현지 정밀조사하고 대구문화방송이 촬영한 화면에 대한 정밀분석작업을 벌여 진위여부를 가릴 계획이다.

환경부는 정밀조사 결과 호랑이로 판명될 경우 종합적인 호랑이 보호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밀렵감시단을 투입해 밀렵단속을 강화할 방침이다.

환경부는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호랑이 서식여부 논란이 벌어지자 호랑이표범 서식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서기도 했으나 이렇다할 심증을 굳히지 못했다.

이 조사단의 한사람으로 7년째 호랑이 존재 여부를 추적해 온 한국야생호랑이ㆍ표범보호보존연구소 임순남(45) 소장은 "경북 북부지역을 비롯한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된 흔적과 서식환경 등을 감안할 때 호랑이나 표범이 틀림없이 생존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임 소장은 휴전선 철책으로 인해 북한으로 가는 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휴전선에서부터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강원도, 경북, 경남지역 산속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어 발견지점도 태백산맥 줄기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호랑이나 표범이 야행성인데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워낙 깊은 산중에 서식하기 때문에 실체를 확인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대규모 장비와 인력을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장기간 설치하고 잠복해야만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번 대구문화방송의 노력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발견된 발자국과 흔적 등으로 짐작할 때 우리나라에 호랑이와 표범이 각 10마리 가량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경북북부 지역의 호랑이는 지난해 강원도 산불로 남하한 뒤 그대로 눌러앉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임 소장은 비무장지대, 소백산, 지리산, 경북북부 등지에서 호랑이ㆍ표범추적활동과 함께 지금까지 발견된 배설물과 발자국, 영역표시 흔적과 주민 목격담을 토대로 생태지도를 제작중이다.

남한에서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호랑이가 사살된 것이 마지막 공식기록이다.


북한지역 백두산 등에 서식 추정

그렇다면 북한에는 한국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을까.

1997년 8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백두산 소백수골에는 범과 같은 희귀한 산짐승도 있는데, 이것들은 정일봉 소백산 사자봉 곰산 일대의 넓은 구역들을 활동무대로 하여 먹이 활동을 벌인다"고 보도했다.

또 강원도 고산군, 세포군 일대에 솟아있는 추애산과 자강도 룡림군 와갈봉에도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특히 지난 4월27일 "묘향산 백운대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되어 있는데 호랑이, 곰 등의 활동흔적도 발견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평양의 언론들은 구체적으로 북한지역에 몇 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는지는 한차례도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지역에는 백두산호랑이가 지린(吉林)성에 7~9마리, 헤이룽장(黑龍江)성에 5~7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헤이룽장성에서는 지난해 12월 이후 야생 백두산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두번이나 일어났으며, 지린성 옌볜(延邊) 둔화(敦化)시 지역에서는 방목하고 있는 소들이 호랑이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둔화시 지역에서 방목되고 있는 소를 잡아 먹은 호랑이는 발자국이나 배설물 등으로 보아 수놈 2마리와 암놈 1마리인 것으로 야생동물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호랑이 소동] 호랑이 찾아 8개월, "악적고투가 따로 없었다"

대구문화방송(M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한국호랑이를 찾아 처음 산을 타기 시작한것은 지난해 12월 중순. 30년만의 대설로 모든 산들이 무릎에서 가슴팍까지 차 오르는 눈으로 뒤덮여 위험 천만 이었다.

게다가 대구문화방송사로서는 창사이래 최대 규모의 제작비(2억원)와 인력 장비 등을 투입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어떻하지?”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 같은 상황속에 기약 없는 긴 등정이었지만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발걸음은 자신만만했다.

“한국 호랑이는 분명 살아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실제 제작팀은 호랑이 찾기에 앞서 3개월간 현장 주민들의 증언 등 철저한 자료수집과 분석과정을 거쳤다.

지난해 9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에서 일주일동안 6마리의 개를 물어간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주민목격담과 동물발자국 및 배설물 분석, 야생동물보호단체와 관계 전문가의 연구 등 3개월간의 추적조사결과 평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동물과는 확연히 다른 맹수류가 서식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장정에 나선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총 17명. 호랑이 특별취재팀 기자와 카메라 촬영기자 그리고 14개 야생동물보호연구단체가 모여 만든 야생동물연합소속 전문가 등으로 짜여졌다.

등정에 앞서 1주일간 “호랑이를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종합계획을 수립한 이들은 우선 인원구성을 현장 추적팀(13명)과 지원팀으로 나누고 추적팀은 다시 2인 1조 6개 팀으로 분류, 산을 타기로했다.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처음 도착한 곳은 경북 문경. 호랑이가 살아있다면 백두대간 이주 이동경로일 것으로 분석한 제작팀은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인 경북 문경부터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조사는 우선 주민목격담을 청취한 뒤 현장 추적팀 6개 팀이 분산해 산에 올라 동물의 이동경로와 흔적을 찾고 신빙성이 있는 흔적이 발견되면 전문가들이 모여 종합조사를 실시해 카메라 촬영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맹수가 아닌 일반 야생동물의 흔적이더라도 꼼꼼히 챙겼다. 아직까지 한번도 이뤄지지 않은 남한지역 백두대간의 야생동물 첫 서식 밀도조사 차원이었다.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문경에 이어 영호남과 충청도 등 3개 지역의 접경지역으로 잘 알려진 삼도봉을 거쳐 경북 봉화 청송 영덕 영천 등으로 남하했다 다시 강원도로 들어가 오대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민통선을 넘어 비무장지대(DMZ)까지 다달아 1차 조사를 마쳤다.

이 때가 2001년 4월초. 조사에 나선지 꼬박 4개월이 지난 때였다. 제작팀의 총 이동거리만 670km. 제작팀이 오른 면적은 백두대간 10%. 남한지역 백두대간의 주요 산줄기는 모두 오른 것이다.

또 믿을 만한 주민들의 맹수 목격담도 150건이나 청취했다.

무수한 위험의 고비도 넘겼다. 동물들의 이동경로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다니지않은 산길을 헤집고 다녀야했고 2-3시간 들어간 깊은 산속에서는 언제 어느 때 큰 짐승이 들이 닥칠 지도 모른다는 두려임이 상존했다.

해빙기에는 등반도중 돌이 굴러 내리는 일이 잦아 더욱 위험했다. 실제 제작팀의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제작팀은 1차 조사를 종합한 중간회의 결과 맹수의 서식 가능성이 가장 높은 3곳을 선정했다. 1곳은 호랑이 2곳은 표범이나 스라소니로 예상했다.

여기에는 동물의 발자국과 배설물 등 흔적에다 지역주민 신빙성 있는 목격담이 주된잣대가 됐다. 제작팀은 이들 3개 지역에 먹이를 주기적으로 공급하고 무인 카메라 13대를 집중 설치했다.

모두 이번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도입한 최첨단 무인센서카메라들이 었다. 1주일에 한번씩 현장을 찾아 카메라 촬영내용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야생동물들의 신비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포착됐지만 제작팀이 고대하던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청송서 촬영 후 40여일간 정밀조사

그러던 지난 6월25일. 장마에다 잦은 폭우로 동물들이 이동을 꺼려 큰 기대없이 경북 청송에 설치된 카메라를 확인하는 순간 제작팀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카메라에 포착된 동물과는 전혀 다른 물체가 드러난 것이다. 6월22일 새벽3시 34분에 찍힌 이 동물의 움직임도 전혀 달랐다.

그동안 카메라에 잡힌 대부분 동물들이 포착순간 발생하는 플래쉬에 놀라 카메라쪽을 응시하거나 달아나는 모습이었으나 이 괴물(?)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오히려 카메라 반대쪽을 1분가량 주시하며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이 동물을 분석한 결과 1차적으로 호랑이 스라소니 삵 등 3동물 가능성으로 압축했다.

2차로 화면정밀 분석작업과 외부전문가 등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어린 호랑이라는 최종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스라소니는 꼬리가 짧아 카메라에는 잡힌 S자 모양의 꼬리에 비춰 배제됐고 살쾡이는 커야 60cm(일부에서는 90cm라고 주장하나 잘못된 것이라고 함: 대구MBC주장)인 점으로 볼 때 1m20cm에 달하는 카메라내 동물과 비교할 때 맞지않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풀리지않은 숙제가 있었다. 호랑이라면 몸전체에 나타나야할 줄무늬가 카메라에 포착된 동물의 경우 다리안쪽과 가슴 등에는 보이나 등이나 꼬리 다리 바깥 등 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않는 것이었다.

제작팀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만간 해답을 찾았다. 동물원의 호랑이를 무인센서카메라로 같은 조명으로 촬영한 결과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다.

전문가의 조사결과 밝기가 다른 두색이 서로 영향을 받아서 밝은 색을 더 밝게 어두운 색은 더 어둡게 보이는 명도대비현상이 있는데다 직접 조명이 아닌 반사광에 찍혔기때문이라는 해석을 얻었다.

외국전문가의 인정도 받았다. 지난달 29일 대구문화방송을 방문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지역 연구소 시장인 피크노프 박사와 니콜라에프 박사가 화면에 잡힌 동물의 모습과 주민들의 목격담, 그동안 찍은 발자국 화면 등을 검증하고는 어린 호랑인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앞서 올 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극동표범 보호세미나’에 참석한 70여명의 야생동물 전문가들도 대구문화방송이 갖고간 자료에 대해 “완벽한 대형 고양이과 동물 발자국”이라고 검증했다.

하지만 대구문화방송이 이달 1일 이 같은 한국호랑이 촬영사실을 전국적으로 방송한뒤 “호랑이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만만찮게 제기됐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호랑이와는 다르고 살쾡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들이었다.

다큐멘터리촬영 특별취재팀 현장 팀장역할을 맡은 대구MBC 오태동(33)기자는 “이번 다큐멘터리 촬영은 다소 작위가 있는 기존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촬영이었고 특히 주민목격담과 동물발자국 배설물등 자료들을 외국인 전문가들이 분석한 결과 ‘결코 살쾡이가 아니며 어린 호랑이다.’고 주장했다”며 “관계 당국의 정밀조사와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대구=유명상사회부기자 msyu@hk.co.kr

  이해인수녀님 시 "꽃이 되는건"
작곡 : 김태원
노래 : 부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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