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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기독교와 천주교의 항일운동과 친일행위

큰달팽이 2015. 8. 22. 10:02

★ 일제 강점기에 기독교와 천주교의 항일운동과 친일행위

 

필자는 이틀전에 “천주교의 전통제사허용이 과연 기독교신앙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주제의 논문에서 1936년에 비오11세 교황이 태양신(天祖大神)의 직계후손이라는 천황과 일본의 귀족 귀신들에게 절하고 숭상하는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이라고 허용하는 전교를 내렸다는 것http://k.daum.net/qna/openknowledge/write_encyclopedia.html?action=edit&qid=4tILc과 또한 이러한 귀신에게 절하는 우상숭배 행위를 허용하므로서 유교의 전통제사를 금할 명분이 사라져 3년후에는 동양의 전통제사의식을 허용하는 전교를 내리게 되었다는 내용을 게재 하였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비전문가”라는 ID를 가진 자가 개신교가 과거 신사참배에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당시 몰지각한 일부 친일목사들의 비위를 예를 들면서 마치 개신교단의 목사 전체가 그렇게 친일하고 몰지각한 행동을 한 것처럼 매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 당시 일제말기에 친일했던 목사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시골 농촌으로 내려가 조용히 신자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을 유지해야 했고 또한 도시에 잔류한 목사들도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고달픈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합방한 초창기에는 교회에 대한 간섭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선교사들과 교회의 교역자들이 조선인에게 애국,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며 또한 무지한 농촌사람들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고 물산장려운동 근검절약 금주금연 운동등 계몽운동을 벌리므로 이런 활동을 하는 교회에 대하여 경계하며 방해하고 간섭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제말기에는 이런 박해가 극에 달하여 일본의 정책에 호응하고 협조하지 않는 교회와 목사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벌하여 극렬하게 반항하는 목사들은 감옥에 집어넣고 또한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일본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회피하고 말을 듣지 않는 목사와 교회들은 다 교회에서 쫓아내고 교회를 철페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제말기에는 개신교회의 2/3가 문을 닫고 아울러 목사도 그 수효만큼 강단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등 모든 교단의 얼마남지 않은 교회들마져 다 일본 기독교단 소속으로 강제 통페합 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살아남은 교회라는 것은 다 친일하는 목사들이 그 큰 교회를 꿰차고 들어 않아서 일제에 아부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더욱 일제의 눈치를 보면서 밉게 보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일제의 정책에 협조하는 가운데 단체로 신사참배를 하고 또한 보국대를 만들어 길을 딱고 공공시설을 보수하고 채광하는 등 노력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부의 친일 목사들의 행위였으며 대부분의 바른 신앙의 목사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의주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한경직목사님과 같이 적극적으로 항일운동하지 않고 충실하게 목회만 하던 목사님들도 다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교회를 쫓겨나고 낙향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래도 끝까지 교회를 지키려고 나중에는 신사참배를 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마는 결국은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어서 교회를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일제의 암울기에 가장 활발하게 애국, 보국, 독립운동을 한 종교는 개신교였던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개신교회였던 것입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궐기했던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개신교 지도자 였습니다 또한 삼일운동으로 개신교회가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아서 47개교회가 전소 내지는 파손되었으며 6월말까지 투옥된자 9458명 중에 22%인 2087명이 개신교 신자였던 것이 이것을 밝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후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 처분된 123명 가운데에 91명이 개신교인이었고 천주교인은 단 2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일제시대에 애국운동도 개신교가 제일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했다는 것을 그 당시의 통계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천주교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천주교회는 교회차원에서 이런 보국운동들에 대해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교황청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조선 강제 합방과 착취 억압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항의를 제기한 바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조선 천주교인들의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황청은 이태리 무솔리니 정권과 히틀러정권과 타협하고 야합하면서 동양에서 크게 득세하던 일본제국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습니다(나중에 독일 이태리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음) 그리하여 일본의 신사참배가 일본 천주교내에서 문제가 되었을 때에도 일본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일치감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식의 하나로 해도 무방하다는 전교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천주교는 이런 교황의 전교에 의하여 아무 꺼리낌 없이 신사참배를 하고 일제의 정책에 큰 반발을 보이지 않고 순응함으로 해서 개신교보다는 미움과 박해를 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처음에 일제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와 또한 신사를 지어놓고 모든 국민들이 여기에 참배할 것을 강요 했을 때에 모든 교회들이 다 반대 했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일제의 간섭과 핍박이 심해지는 가운데 이들의 강요를 견디지 못하여 처음에는 침례교 그리고 다음에는 감리교 성결교 그리고 끝에 가서는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단까지도 총회에서 신사참배 하기로 결의하여 굴복하고 말았고 결국에 가서는 교단자체가 다 없어지고 일본 기독교단에 통합 흡수되어 버리는 굴욕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잃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순교한 사람들과 감옥에 투옥되었던 교인들이 수백명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개신교인이었고 안식일교회 교인이 몇사람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 일부가 출옥하고 나와서 조직한 교단이 지금 부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고신교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배경과 실상을 모르는 단순한 불신자들과 천주교인들은 반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좌익단체에서 만든 왜곡되고 과장된 역사책을 보고 개신교 일부 성직자들의 신사참배를 과장하여 비난하면서 개신교단와 거기 속했던 성직자 전체를 일제에 아부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몰지각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문가”라는 자가 본인과 논쟁하는 중에 그 당시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하기 전에 신사참배를 먼저 한 기록을 고신대학원 설립기념의 설교문에서 발췌하여 인용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때 그 사건이 천주교에는 적용이 안된 사건이었겠습니까?

미사나 천주교의 총회에서도 그런 신사참배하는 국민의례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개신교에게만 강요되고 해당되는 내용이었을까요?

예배나 미사나 다 똑 같이 유일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였는데 말입니다

 

일제가 신관을 동원해서 개신교인들을 끌고 강변에 가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다시 신도식의 세례를 받게 하고 또한 총회에서도 그런 식의 세례예식을 하도록 결의를 강요했다면(일제가 신관을 동원해서 기독신자들을 강변으로 끌고간 것을 보아서 그것은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그런 결의를 한 것이지 목사의 상식으로는 자발적으로 도저히 그런 행동은 할 수 없는 것임) 천주교의 영세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겠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개신교나 천주교나 다 똑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 그런 것을 개신교에만 하도록 강요 했겠습니까?

개신교에게 강요했다면 천주교에 대해서도 강요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도 강요 받았다면 아마 그 당시 천주교가 일제의 정책에 자발적으로 협조했던 행태로 보아 천주교는 일제가 강제로 교인들을 강변으로 끌고 가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그런 국민의례와 세레 행위를 성당에서 했을 것으로 사려 됩니다...

다만 천주교에서 그런 사건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지도자들이 철저히 함구 하고 비밀에 부쳤거나 어떤 공적인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여튼 그런 결의가 설혹 개신교단 총회에서 일제의 강요와 친일교역자들에 의해 있어진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체 개신교회에서 실제로 그대로 행해진 일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필자가 일제 강점기에 목회 했던 여러 원로 교역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그런 신사참배 하는 국민의례는 없었고 다만 찬송가 가운데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못 부르게 해서 그것을 개작해서 불러야만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습니다

더구나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세레를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베풀었다는 것은 어느 원로목사님에게서도 들은 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을 논하기에 앞서서 “비전문가”는.... 왜 천주교의 제사문제를 논하는 마당에 개신교의 신사참배문제를 끄집어 내어 논제의 초점을 흐리고 엉뚱한 데로 문제를 바화시킵니까?

그런 비열한 응대와 내글을 짜깁기하여 본래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며 엉뚱하게 필자를 거짓말쟁이로 왜곡하고 변질시키려는 조악한 행태로 인해 “비전문가”를 “더티한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주교가 제사를 허용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개신교가 과거 신사참배했다고 해서 지금도 신사참배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천주교와 같이 전통제사를 신사참배한 것과 연관해서 지금 개신교에서도 전통제사를 허용하고 있단 말입니까?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찬습니까?

 

개신교에서는 솔직하게 과거에 교단차원에서 신사참배했던 과오를 매해 삼일절 기념예배를 드릴 때면 설교에서 지적하면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치 말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정부차원에서 학교마다 단군상을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몇차례 추진할 때에도 또 다시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단군상을 세우지 못하게 막고 극렬하게 반대하여 결국은 철폐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천주교의 교황청은 과거 신사참배를 허용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문을 발표하고 용서를 빈 적이 있습니까?......

한번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한국의 천주교가 삼일절 기념미사를 드리면서 언제 일제강점기에 교황이 신사참배 허용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참회하고 사과하는 발언을 한적이 한번이나 있습니까?....

그런 것도 없으면서 무슨 과거의 개신교에서 신사참배한 것을 지적하고 비난합니까?

이는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인 것입니다

 

과거에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현재의 형편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개신교는 신사참배나 전통제사나 그것은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것은 성경 고린도전서 10: 20절 말씀 "대저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 그런 행위를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천주교는 과거 신사참배를 자발적으로 했으나 여지껏 거기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과하는 발언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귀신에게 절하는 전통적인 제사방식을 천주교 신자들이 하도록 허용하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 다른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2번째 계명을 어기는 행위요 고린도전서에 이방신이나 귀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불순종하고 어기는 범죄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죄악인 것입니다

이것을 필자가 지적하고 문제삼는 것이요 천주교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사이비 거짓종교임을 판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입니다

 

2012. 진리의 나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