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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유물인 고배. 가야가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것이 성찬에 사용한 잔이라고
주장한다. | |
황정욱
교수, ‘가야는 기독교국가’ 주장에 전면반박
“전래
흔적 없어… 도마가 가야 선교했다는 주장은 허구”
▲가야의
유물인 고배. 가야가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것이 성찬에 사용한 잔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 중 대부분은 그 대표적인 근거로 경북 여주 평은의 왕유리 석상이
사도 도마의 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발견한 유우식 씨(전 관악고등학교 교사)는 석상 우측의 각자(刻子)를 히브리어로 ‘도마의 손과 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령의 김동윤 장로와 대구의 조국현 목사는 왕유리 석상 외에도 가야 지역의 몇몇 고고학적 발굴물을 근거로 가야가 사도
도마를 통해 복음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왕유리 석상은 사도 도마를 기념하는 석상이다 ▲수로왕은 세례를 받고 왕위에 등극하였다
▲가야 시대 유물 중 고배와 뿔잔은 성찬기다 ▲쌍어문은 오병이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쌍어문은 그리스도교 상징이다 ▲삼국유사가 기록한 바,
수로왕의 출현을 노래한 구지가는 찬송가다.

하지만
최근 연세대학교 신학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학연구원·한국기독교회사학회(원장 민경배 교수) 월례세미나 제100회 기념강좌에서 한신대 황정욱 교회사
교수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판단할 때, 가야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황 교수는 또 “단순히 도마의 가야
선교라는 허구에서 연역 추리하여 석상을 그리스도교의 유물로 보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밝히며 가야의 복음화 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다음은 황 교수의 주요 발제 내용.

<반론1>
도마 혹은 다른 선교사가 가야로 올 수 있었는가?
먼저
사도 도마 혹은 다른 선교사가 인도 동부 해안을 출발해서 가야로 올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이다.
동진(東晉)의
고승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에 의하면, 볍현은 인도에서 11년간 구도하다가 409년 초겨울 갠지스 강 하구에 있는 다마이제국에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십사일 만에 사자국(獅子國)[현 스리랑카]에 이르러 2년간 체류한 후, 중국 상선을 타고 3개월여 간의 난항 끝에 사파제국[현
수마트라]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서 5개월 머물다가 412년 4월에 인도 상선을 타고 북상해서 3개월 만에 산동반도 뇌산에 도착했다. 그가
귀국하는 데 소요한 시간은 2년8개월이나 되었다.
만일
1세기에 인도에서 가야로 오려고 한다면, 일단 중국까지 항해한 후 중국과 한반도 간의 항해로를 따라서 항해했을 것이다. 한중간의 고대 항로는
횡단로와 연안로가 있었다. 그러나 횡단로에는 해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난파의 위험이 매우 높았고, 불안전했다. 그래서 이 남방 횡단로는
6세기말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가야로 올 경우 산동반도에서 출발해서 발해만을 건너 요동반도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압록강 하구에 도달하고, 그 다음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가야에 도달하거나 혹은 부안에 도착해서 육로를 이용해서 가야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상의 서술은 공간적 이동 경로가 그러했다는 것을
이론상으로 말할 뿐이다.
사도
도마가 활동했던 1세기에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아직 원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도마나 혹은 다른 사도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기
위해서 해로를 택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매우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함은 고사하고, 난파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반론2>
왕유리 석상에 ‘도마’라고 적혀 있는가?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이다.
종교적
선입견이 없는 관찰자가 왕유리 석상을 관찰한 후 그리스도교 도상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석상이 그리스도교 유물이라는 주장은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고고학자
한신대 이남규 교수는 왕유리 석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석상의 손 모습과 의복의 주름 모양을 보아서는 고려나 조선 시대의 불상으로
보이며, 각자(刻子)는 조선조의 것으로 보인다. 인물상 좌측의 4 각자(刻子)는 현재로서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이
석상을 고려 혹은 조선 시대 불상으로 판단한 것이 백 퍼센트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석상에서 그리스도교와 연결할 만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반론3>
가야 고배는 성찬의 잔으로 사용됐는가?
옛
가야 지역에서 다수 출토된 고배(高杯)를 성찬에서 사용된 잔으로 볼 수 있는가?
학계에서는
고배(高杯)를 일상적 식기라기보다는 제기(祭器)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배를 장식하는 역할을 했던 투창(透窓)을 형태별로 장방형, 삼각형,
원형, 화염형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조국현 목사는 화염형 투창이 예수의 손에 박힌 못 자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설득력 있는 증빙 자료가 요구된다.
또한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가야 시대의 기대(器臺)는 맨 밑 부분의 투창이 십자형으로 관찰자의 주목을 끈다. 그러나 십자 형상은 이미 언급한
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문양이며, 그리스도교만의 상징물로 여기는 것은 금물이다.

<반론4>
삼국유사 구지가(龜旨歌)는 찬송가인가?
삼국유사
가명국기(駕洺國記)에 삽입된 구지가(龜旨歌)는 사행시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번역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이다. 구지가는 집단가요, 노동요, 혹은 거북의 목을 내게 하려고 부른 동요였던 것이 수로왕을 맞기 위한 술가로(術) 변이되었다고
보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반면
조국현 목사는 구지가를 찬송가로 주장하면서 이렇게 변역한다.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되신 성령이여 나타나시옵소서,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적군에게 태워지고 포로되어 갑니다’ 구하(龜何)는 음독하여 ‘구하소서’로 번역하고 그 이하는 향찰(鄕札) 표기로 본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또 ‘적군에게 태워지고 포로되어 간다’는 번역이 어떻게 가능한가?
<반론5>
쌍어문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며 수로왕이 그리스도인가?
아동문학가
이종기는 인도 아요디아에서 수로왕릉의 쌍어문과 유사한 형태의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조국현 목사는 쌍어문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쌍어문은 아요디아 고유의 문장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신성, 힘, 풍요를 상징한다.
한국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잔의 쌍어문이 최고의 것이며, 김해 은하사(銀河寺) 대웅전, 양산 계원사(溪源寺) 대웅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수로왕릉의 정문 조성 연대는 정조 이후로 보아야 하며, 이것은 쌍어문이 가야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부인하게 한다.
따라서 쌍어문은 수로왕의 신앙과는 무관한 후대인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