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수도 니네베를 발굴한 오스틴 레어드
* 요나 이야기
유대인에게 있어 니느웨(니네베)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적대세력 아시리아의 수도였다. 기원전 7세기경 요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다. 야훼는 그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죄악을 책하고 선교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잔인한 전쟁으로 유명한 아시리아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요나는 야훼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려고 지중해 건너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스페인의 무역도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바다에 풍랑이 몰아쳐 파선 위기에 놓이자 사람들은 누군가 신에게 죄를 지은 결과라고 해석했다. 바다의 신에게 인신공양을 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결국 요나가 뽑혔다. 요나는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고 커다란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요나가 회개하자 물고기가 3일 후 그를 해변에 토해내고 사라졌다. 원래의 목적지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가 40일 후 니네베가 파괴될 것이라고 외치자 왕 이하 니느웨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고기 사건보다 더 큰 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어도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그 어디에도 흔적조차 없었다.
* 한 고고학자의 집념하지만 후에 한 고고학자에 의해 언덕 밑에서 니느웨(니네베)가 발굴되었다. 영국인 오스틴 레어드에 의해서였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파리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이탈리아 피렌체와 스위스에서 보냈다. 그때 레어드는 아버지를 따라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돌아보며 골동품과 미술품 보는 눈을 키웠다. 소년은 그림도 배웠는데, 이것은 뒷날 그가 유물들을 스케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계주의를 지향했던 그는 육로로 소아시아와 근동을 거쳐 인도와 실론까지 여행하는 꿈을 키워나갔다. 레어드는 스물두 살 때 무작정 아시아로 향했다. 레어드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뭍길을 통해 1839년 7월 메소포타미아로 갔다. 그 무렵은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여러 민족이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들어 몹시 어수선할 때였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옛 문명을 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강렬했다.
터키와 페르시아를 여행한 후 1840년 4월 그는 모술에 닿았다. 강 건너에 니네베의 폐허일 것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둔덕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날마다 둔덕을 탐색하는 일로 하루해를 보냈다. 아무 데도 돌기둥이나 조각품은 없었다. 둔덕들은 그저 밋밋하게 솟은 흙더미였다. 레어드가 1주일이나 더듬은 둔덕은 높이가 28.5m나 되었다. 어림잡아 12만 톤이나 되는 흙을 파헤치려면 일꾼 만 명이 10년도 더 달라붙어야 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빈털터리 청년이 도전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그곳을 파보고 싶은 마음은 뜨겁게 타올랐다.
1842년 레어드가 페르시아에 갔다가 모술로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서 있었고, 영사 에밀 보타가 퀸지크 둔덕을 발굴하고 있었다. 레어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보타를 만나 보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어드로서도 발굴을 더 늦출 수 없었다. 그는 보타를 찾아가 둔덕에 틀림없이 중요한 것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 뒤 발굴 자금을 구하러 영국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콘스탄티노플에 들른 그는 영국 대사 캐닝의 협조를 받기 위하여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1845년 11월 캐닝 대사에게 비공식 외교관으로 채용되어 외교업무를 수행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어느 날 보타로부터 코르사바드라는 곳에서 옛날 궁전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캐닝 대사에게 외교관 신분증과 60파운드를 얻은 레어드는 다시 모술을 찾았다. 그는 님루드로 가서 유목민 부족 우두머리와 사귀었다. 님루드에 그가 점찍어 둔 둔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님루드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증손자로 그가 ‘앗수르’로 니네베를 건설했다고 전한다.
* 님루드 발굴
(출처;encyber.com)
1845년 그는 님루드를 니네베로 잘못 알고 발굴을 시작했다. 님루드는 성경의 도시 ‘갈라’로 기원전 13세기의 아시리아 수도로 약 천 년 간 존재했다. 님루드는 모술에서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티그리스 강 제방에 위치한 유적이었다. 첫날부터 궁전의 잔해들이 발굴되었다. 삽질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석판 여러 개가 나왔다. 그 얇은 돋을새김은 전투장면을 새긴 것이었다. 전체가 짜임새 있고, 사람과 말의 근육까지도 세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조각이나 부조를 책이나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것을 본 문명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라마스)
어느 날 일꾼들이 달려와 레어드가 뛰어가 보니 날개 달린 사람 머리가 흙 위로 나와 있었다. 아시리아인은 사람의 뛰어난 머리와 사자의 힘센 몸뚱이, 독수리의 날랜 날개를 숭상했다. 사람 머리에 날개 달린 사자는 신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조상(彫像)과 부조(浮彫)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에는 날개가 달린 사자와 황소 조상은 열세 쌍이나 나왔다. 특히 머리는 인간이고 몸은 날개 달린 황소인간 ‘라마스’를 많이 발견했다. 모든 신전의 입구에 있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라마스와 유사하다. 인간의 머리에 몸통의 앞부분은 사자이며 뒷부분은 황소로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있다. 두 문명 사이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핑크스는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생명체다. 솔로몬 성전에도 날개가 10m인 두 마리의 그룹이 있었다. 그룹도 스핑크스의 한 종류였다.
(님루드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상아 조각품‐ 좌로부터 님루드의 모나리자, 스핑크스, 파피루스 초원의 사자와 흑인‐아마도 갑자기 들어 닥친 갈대아군의 공격을 피하여 황급히 달아나면서 귀중품들을 우물 속에 쓸어 넣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검은 오벨리스크)
님루드 둔덕의 폐허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이었다. 60만평이나 되는 대규모 성채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토판들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이 발굴로 레어드의 명성은 보타를 앞지르게 되었다. 이후 1847년까지 2년 동안 레어드는 이곳에서 6개의 궁전을 발굴해낸다. 석회석의 벽 부조에는 사람의 머리를 한 어마어마한 황소들의 석상과 유명한 검은 오벨리스크도 발굴하였다.
돌에는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의 수많은 정벌을 기념하는 비문과 일련의 자세한 그림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다 왕 예후가 살만에셀엑 절하고 있으며, 수많은 이스라엘 노예들과 시종들이 앗수르의 왕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 기원전 7세기 니네베의 센나케리브 궁전 발굴
(모래가 덮인 니네베 유적지에서 복원한 니네베 성벽)
레어드는 다음 발굴지를 티그리스 강변의 퀸지크 둔덕으로 정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니네베일 것으로 믿었다. 파볼 만한 곳이 많았음에도 그는 보타가 1년을 파헤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곳을 다시 파들어 갔다. 그는 둔덕의 겉모습만 보고도 어디를 파야 할지 알았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레어드가 예상한 대로 퀸지크는 니네베 궁전 터였다.
1849년 가을 그가 땅 속 6m에서 찾아낸 니네베 궁전은 기원전 7세기의 센나케리브 왕의 궁전이었다. 그는 아시리아 최대의 정복 왕으로, 니네베를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은 장본인이다. 센나케리브 왕궁은 전체면적이 가로 180m, 세로 189m 나 되는 규모였다. 레어드는 여기에서 엄청난 유적을 발굴했다. 유명한 석판 유물 대부분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주요 출입구 몇 군데에는 측면에 사람 머리를 한 황소의 조각상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니네베 궁전과 티그리스 강)
원래 니네베는 남북 4.8km, 동서 1.2∼1.6km의 규모로, 약 664만m2에 이르는 매우 큰 도시였다. 도시 한편으로는 티그리스강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 전체는 거대한 열다섯 개의 성문을 가진 내벽과 외벽으로 된 이중 성곽으로 싸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 밖을 둘러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moats)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견고한 성채였다. 고대에는 외적으로부터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강가 옆이나 구릉지대, 산 위 등 천연적인 요새를 활용하여 성을 쌓았다. 그리고 두꺼운 성벽도 이중으로 세웠다. 또 성벽 주위에 인공 호수를 파서 외적이 쉽게 접근치 못하도록 이중 삼중의 보호막을 설치했다.
기원전 7세기 고대의 토목기술도 대단했다. 센나케리브는 니네베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길이 80km에 이르는 석조 운하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도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18개의 수로 망을 통해 구릉지대에서 물을 끌어다 썼다. 센나케리브는 새로이 들여온 목화 농사를 위해 종종 물이 부족한 때가 있던 티그리스 강과 호스르 강 대신 니네베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개울을 찾아내 그 물을 돌로 만든 대형 운하를 통해 호스르 강으로 끌어왔다.
(약 3만점 이상의 점토판 문서가 대량으로 발굴된 곳)
니네베에서 온전한 상태의 점토판과 비문이 쏟아져 나오자 설형문자 연구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설형문자는 처음에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새겨진 것을 1802년 독일인 게오르게 그로테펜트가 실마리를 푼 뒤 한동안 주춤했었다. 그러다 레어드의 엄청난 발굴에 힘입어 1857년 영국인 헨리 롤린슨이 완벽하게 풀어냈다. 이로써 아시리아 문명의 2500년 전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출처; 스포츠 투데이, 추적발굴현장)
*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
지금으로부터 5~6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메르·아카드·바빌로니아·아시리아가 차례로 번성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2500년 아수르 지역에 세워진 국가다. 상비(常備)시민군을 만들면서부터 강해졌다. 기원전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했다. 기원전 960년부터 350여 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큰 제국이었다. 그 세력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까지 미쳤다.
사르곤 왕조는 사르곤 2세에서 시작되어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까지의 4대 90여년을 가리킨다. 사르곤 왕조가 제국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하는 2대 통상로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정복지에서 공납물의 유입과 교역품에 대한 징세로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복지의 주민을 강제로 본토로 이주시켜 강제 노동과 병역의무를 부과시켜 우수한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궁전벽면 부조, 아슈르바니팔 왕의 사냥모습)
왕궁 터에선 “나는 강력하다. 정말로 강력하다. 모든 왕 중에서 나와 겨룰 자는 없다”며 자신만만했던 ‘아슈르바니팔 대왕의 사자 사냥도’ 가 발견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뛰어난 사실적인 조각이다. 이러한 사실적 기법은 왕궁의 문에 2개씩 쌍으로 세워놓은 ‘라마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의 얼굴에 독수리 날개를 단 거대한 황소상(像)인 라마스는 아시리아의 수호신상이었다.
또 왕궁 도서관에는 진흙을 구은 점토판에 쐐기모양 글자를 새긴 책이 2,500개나 묻혀 있었다. 점토판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서아시아 방방곡곡에서 거두어들인 자료였다. 거기에는 철학· 천문학· 수학· 의학은 물론 왕의 계보와 역사, 문학· 가요도 있었다. 이 도서관에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레어드가 1851년 니네베 아슈르바니팔 궁전 지하서고에서 발견했다. 모두 12개의 점토판에 134행의 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812년부터 126년 동안 우르크를 통치했던 왕이다.
* 길가메시 서사시
(길가메시의 부조상. 코르사바드에 있는 사르곤 2세의 궁전 터에서 발견된 조상으로 품에 사자를 안고 서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돋을새김한 수메르의 거인왕, 당시 실제 거인족이 살았다는 설이 있다)
길가메시는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이었으며 키가 4미터나 되는 영웅이다. 길가메시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지우수드라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신처럼 영생을 누리고자 했던 그가 끝내 죽음 앞에 굴복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고, 둘째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와 너무나 흡사한 대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이다. 점토판 내용이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성경 내용의 원형으로 보인다.
* '니네베와 그 페허들’
기원전 700년 아시리아의 수도가 된 니네베(니느웨)는 그 무렵 가장 큰 도시였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너비가 9.6m로 그 위로 수레 3대가 달릴 만큼 두터웠다. 그리고 23m나 솟은 성벽을 너비가 24m인 방어용 연못이 둘러쌓고 있었다. ‘상인의 수가 별 보다 많을’ 정도로 번창했던 세계의 중심지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아시리아 왕의 엽기적인 최후, 충복들에게 애첩들을 살해하게 한 후 불을 질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불태웠다함)
메디아, 칼데아, 스키타이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니네베의 계절적 약점은 1년 내내 서쪽에서 심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한 연합군들은 니네베성의 서문 밖에 마른 풀을 산 같이 쌓아올리고 불을 질렀다. 강렬한 불길은 니네베성 안으로 불기 시작하여 맹렬한 기세로 성읍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니네베성은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지금도 니네베 성의 서문과 그 주변은 불에 타 검게 그을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뒤 수 천 년 간 사막 바람이 모래를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었다.
레어드는 자신의 발굴기록을 기록하여 '니네베와 그 페허들'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는 발굴을 마친 뒤 일생을 정치가로 보냈다. 레어드는 1878년 유적 발굴 공로로 기사작위를 받아 헨리경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외무차관, 건설장관, 이스탄불주재 영국대사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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