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피에타는 사실 미켈란젤로가 24살에 제작해
현재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바로 이 작품의 이름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혹은 비탄을 뜻하는 말인데,
대개 아들 예수를 잃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 작품을 보고 내가 느꼈던 감상은
하나님이 정말 미켈란젤로한테 직접 영감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출애굽 할 때 성막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떠올랐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출애굽기 35장 30 ~ 35절 일부)
마치 천사가 조각한 것과 같은 모습.
하지만 조각인데도 너무나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마치 회화처럼 한 면밖에 보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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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차차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할 때,
한 추기경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제작하던 중 난감하게도 그 추기경이 죽어버렸고,
미켈란젤로는 이왕 제작하던 거 완성을 시켜서
피에타를 산 피에트로 성당 공터에 버린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 이 작품은 너무나 놀랍고 완벽한지라
결국 이 피에타는 산 피에트로 성당 안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버려버리는 바람에
누가 이 작품을 제작했는지 사람들이 고민하다가
결국 미켈란젤로가 아닌 엄한 사람을 찬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밤에 정과 망치를 가지고 성당 안으로 숨어들어서
마리아의 어깨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다.
그리고 나서 집에 가는데
미켈란젤로는 문득 회한을 느꼈다.
아. 이 놀라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어느 곳에도 본인의 이름을 새기지 않으셨는데나는 한낱 조각가로 내 이름을 위해서밤에 숨어들어가 하찮은 내 조각에 이름을 새겼구나.
그래서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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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에타는 수난도 많이 겪었다.
1980년대에 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달려들어서
이 마리아의 코와 팔을 박살을 낸 적이 았다.
그래서 지금은 산 피에트로 성당 방탄유리 안,
그것도 유리로부터 대략 1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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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필명을 바꿔왔던 강신행
처음에는 Sola Fides, 라틴어로 '오직 믿음'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Epic Architect, 그러니까 '서사 설계자'.
그리고 남들 모르게 '양치기 소년'이라는 필명을 썼었다가
로마 성 피에트로 성당에서 피에타와 마주친 후
이제는 피에타를 필명으로 쓰기로 했다.
물론 나의 피에타는 감히 원래 의미의 피에타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다른 각도로 보았을 때
마리아도 그리고 죽은 예수님도 사실은 살짝 미소짓고 있듯이
나의 삶과 글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슬픔, 비탄, 그리고 스산한 회한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 훗날 미소지을 만한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24세의 나이에 저런 걸작을 제작했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기고 싶었다. 2009년의 강신행도 24살이기 때문일 것이다.
덧,
피에타는 미켈란젤로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제작했다.
아래의 작품은 프란츠 폰 슈튜크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삶이 다할 때까지 모두 합쳐 네 개의 피에타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명성에 비해 그가 만든 모든 피에타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가장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만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가 만들었던 작품마다 명작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조차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다른 세 개의 피에타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성 베드로 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피에타는 극한에 도달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섬세미와 세련미가 드러난 성모의 옷자락이나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이 안식을 주는 온화한 표정으로 인해 수많은 감상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에 반해 그가 나중에 제작한 피에타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초기 피에타에 비해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강자와 같은 예술에 조예가 얕아 초기 피에타와 같이 겉으로 보아 예쁜 것에 감동을 받는 사람의 경우라면, 배경지식이 없이 네 개의 피에타를 보았을 경우 첫 번째 피에타가 마지막 피에타라고 생각할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물론 미켈란젤로 정도 되는 거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피에타를 제작했을 리 없으며, 따라서 그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첫 번째 피에타만이 유독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제작한 네 개의 피에타 중 주문을 받았던 것은 첫 번째 피에타뿐이었으므로, 자금상황과 같은 것들이 그의 창작을 방해했을 공산도 있다고 볼 것이나, 그의 전기를 수강자로서는 그것 역시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는 언제나 제작한 작품들의 미납금을 수령하지 못해 빚에 시달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혼신의 힘을 쏟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피에타인 ‘론다니니의 피에타’ 는 그 모습이 로댕의 그것과 같은 현대의 조각을 연상시킬 정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맘에 드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새로움에 과감히 도전했을 그의 정신이 느껴지기에 오히려 존경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수강자가 이 글에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지는 예술성 혹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가 피에타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싶은 것이다. 이미 밝혔듯이 그가 만든 네 개의 피에타를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일렬로 늘여놓았을 때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서는, 미켈란젤로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날이 실력이 떨어졌다는 판단을 제일 먼저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야 당연히 있다. 대리석 같이 쇳덩이만큼 단단한 돌을 일일이 손의 힘만으로 쪼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피렌체 피에타’의 예를 들어보면 전혀 그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러나 수강자가 이 글에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지는 예술성 혹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가 피에타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싶은 것이다. 이미 밝혔듯이 그가 만든 네 개의 피에타를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일렬로 늘여놓았을 때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서는, 미켈란젤로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날이 실력이 떨어졌다는 판단을 제일 먼저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야 당연히 있다. 대리석 같이 쇳덩이만큼 단단한 돌을 일일이 손의 힘만으로 쪼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피렌체 피에타’의 예를 들어보면 전혀 그 모습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자태를 자랑한다.
Michael TIppett (1905 - 1998)
Steal Away (from A Child of our time)
The Choir of New College Ox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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