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오?"
그는 생각하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도 알 것 같은데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구먼요."
"그럼 저 게장사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어 보시지. 전 세기 90년경에 우리가 어디 있었느냐고. 아마 그 영감님도 돌아가셨겠지만."
"벌써 돌아가셨지요. 이제 겨우 생각나는군. 크눌프가 아닌가? 앉게나. 이거 미안한데!"
크눌프는 앉았다. 빨리 언덕을 올라와서 몹시 숨이 가빴다. 이제 비로소 산밑의 거리가 아름답게 바라보였다. 푸른 강, 붉고 푸른 지붕들, 그 사이로 푸른 나무들이 작은 섬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좋은 데서 일하시는군."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말하였다.
"그렇지, 불평할 수야 없지. 그런데 자넨? 이런 산을 문제 없이 올라오곤 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그런데 자넨 지금 숨이 끊어질 것 같네그려. 자넨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길인가?"
"그러네. 샤이플레 군. 아마 이번이 마지막 같네."
"왜 그런 말을 하나?"
"폐가 아주 나빠졌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고향에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처자도 있고 집도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일세. 이런 말이야 해서 무엇하나. 자네는 벌써부터 알고 있을 것인데. 이제 와서는 별 수 없지. 대단히 나쁜가?"
"글쎄 잘 알 수는 없네. ―아니 벌써부터 알고 있지. 언덕을 내려가는 것같이 매일 조금씩 더해 간단 말이야. 그래서 혼자 있어 가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네."
"어떻게 하든 자유지만, 건 슬픈 일이야."
"그렇지도 않아.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인데. 석공은 안 그럴 줄 아나. 이 사람, 우리는 지금 이렇게 둘이 앉아 있지만, 그렇게 도도할 수는 없는 것일세. 자네는 벌써 이전에도 딴 생각을 가졌었지. 그 때 자네는 철도 자살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옛 얘기를 그만두세."
"그런데 어린이들은 잘 자라나?"
"별고 없네. 야곱이라는 녀석은 벌써 일하고 있다네."
"그래? 세월은 빨라. 자, 좀 더 걸어 볼까?"
"그렇게 바쁠 것이 없지 않나. 참 오래간만일세! 내가 뭐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말하여 주게. 지금은 뭐 가진 것이 없네만. 한 반 마르크는 갖고 있을 것일세."
"자네나 쓰게. 어쨌든 감사하네."
그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가슴이 괴로워서 입을 다물었다. 석공은 그에게 술병을 기울여 마시게 하였다. 그들은 잠시 동안 멀리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물레방아의 물줄기들이 햇빛에 빛나고, 한 대의 마차가 석교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제방 밑에는 흰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잘 쉬었으니, 이제 또 걸어 봐야지."
크눌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석공은 앉아서 생각하고 있더니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봐, 자네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안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불쌍한 사람일세, 크눌프. 알겠나, 나는 뭐 골수 신자는 아니네마는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믿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야. 자네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런 말한다고 노하지는 말게."
크눌프는 웃었다. 그의 눈은 빛났으나 옛날과 같이 악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친밀하게 치며 일어섰다.
"이제 알게 될 걸세 샤이플레. 인자하신 하느님은, 아마 너는 왜 지방 법원판사가 되지 않았지 하고 묻지는 않을 걸세. 아마 어린애 같은 녀석 또 왔구나 하고 말씀하시겠지. 그리고 아이 보는 일 같은 쉬운 일을 맡겨 주실 것일세."
안드레스 샤이플레는 푸르고 흰 무늬의 샤쓰를 입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와는 진지한 얘기가 안돼. 자네가 천국에 가면 신도 농담밖에 않으실 줄 생각하나?"
"아닐세,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진 말게!"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다. 그 때에 석공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몰래 꺼냈던 작은 은전을 그에게 주었다. 크눌프는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그대로 받았다.
크눌프는 정다운 고향의 계곡을 다시 한 번 보고 돌아서서 안드레스 샤이플레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걸음을 재촉해 어느덧 위쪽 숲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주일 후, 차가운 안개 낀 날이 며칠 지나자 날이 맑았다. 늦게 피는 글로켄꽃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 익는 검은 딸기를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런 날이 며칠 지나자, 갑자기 겨울이 닥쳐왔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사흘쯤 날이 풀리더니 곧 큰 눈이 내렸다.
크눌프는 이 동안 죽 돌아다녔다. 고향의 주변을 목적도 없이 걸어다녔고, 숲 속에 숨어서 석공 샤이플레를 가까운 곳에서 두 번이나 보았으나 그 모습을 관찰하였을 뿐이고 다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끝없고 쓸데없는 괴로운 길을 걸으며 질기고 엉킨 가시덩굴같이 복잡한 일생의 착잡한 생각에 점점 더 빠졌으나 거기선 아무 의미도 위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병이 다시금 중태에 빠졌다. 어느 날, 어쨌든 게르베르사우로 내려가서 병원 문을 두드릴까 하는 마음도 먹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혼자 있다가 산 뒤의 마을을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끔 마을에 가서 빵을 사 왔다. 그리고 산에는 고욤 열매가 많았다. 밤에는 나무꾼들의 통나무 집이나 밭에 있는 짚더미 속에서 지냈다. 지금 그는 눈이 퍼붓는 볼프스 산을 넘어 골짜기에 있는 물레방앗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쇠약하고 피로하였으나 그대로 걸어 마치 수일의 여명(餘命)을 최대한 이용하여 모든 숲과 모든 숲길을 온통 걸어다니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들고 피로하였으나 그의 눈과 코는 그대로 생생하였다. 날쌘 사냥개와 같이 잘 보고 냄새를 잘 맡아 이미 하등의 목적도 없었기에 모든 웅덩이며 미풍이며 짐승의 발자취를 찬찬히 살폈다. 그는 이미 의지를 잃고 발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일 동안 줄곧 그랬던 거와 같이 생각만으로는 지금도 다시 인자하신 신 앞에 서서 신과 함께 끝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신과 크눌프는 서로 그의 생애가 무의미하였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두가 이렇게밖에 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 때 일입니다."
하고 크눌프는 되풀이 말하였다.
"제가 열네 살 때 프란치스카한테서 버림을 당했을 때입니다. 그 때라면 저는 아직 무엇이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저는 파괴되고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죽 저는 전연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지요. 아, 뭐라고 할까요. 잘못이 있다면 당신이 저를 열네 살에서 죽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죽었다면 저의 생애는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때로 완전히 눈보라 속에 파묻혀 보이질 않았다.
'크눌프' 하고 신은 깨우치듯 말했다.
"그대는 젊었을 때 일을 오덴발트에서 지낸 여름과 레이시데텐에서 지낸 일을 생각해 보라! 그대는 어린 사슴같이 춤추며 아름다운 생이 전신에 약동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대는 노래도 부르고 하모니카도 잘 불어 계집애들의 눈을 황홀케 하지 않았는가? 바우에르즈빌에서 지낸 일요일 날들을 잊었는가? 그리고 그대의 최초의 애인이었던 헨리에트를 잊었는가? 그래도 모든 것이 허사였단 말인가?"
크눌프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청춘 시절의 기뻤던 여러 가지 일들이 먼 봉화를 바라보듯이 희미하고 아름답게 피어오르며 꿈과 포도주같이 강렬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며 이른 봄밤의 바람같이 훈훈하게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환희도 비애도 다 아름다웠다. 그런 나날이 하루라도 없었더라면 나의 생활은 비참하였으리라!
"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시인하면서 피로에 지친 어린애같이 반항적이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거기에 죄나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때의 저같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며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며 지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만 그쳤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 때 벌써 행복 속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저는 잘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그런 좋은 시절이 안 돌아왔습니다. 아니 절대로 없었습니다."
신은 멀리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크눌프는 좀 숨을 쉬려고 발을 멈추었다. 흰 눈 위에 피를 몇 방울 토했다. 그 때에 신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서 대답했다.
"크눌프 말해라. 그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대가 건망증이 심한 것을 웃을 수밖에 없어. 그대가 한때 댄스홀의 왕으로 지내던 일과, 그대의 헨리에트의 일을 회상하고 나서 그 때는 아름답고 의의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헨리에트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자베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 여자에 관한 것은 일체 잊어버렸는가?"
그러자 크눌프의 눈에는 과거의 한 토막이 먼 한 줄기의 산맥같이 떠올랐다. 그것은 좀전의 추억처럼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눈물 머금고 웃는 아가씨같이 더욱 신비스럽고 친근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그 속에 리자베트가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팔에는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 나는 얼마나 악한 놈이었던가!"
그는 다시금 탄식하기 시작했다.
"정말 리자베트가 죽고 나서 나도 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맑은 눈으로 크눌프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만둬! 크눌프, 그대가 리자베트에게 큰 슬픔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쁜 것보다도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그대는 그녀에게 더욱 많이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그대를 잠시도 원망한 일은 없었어. 어린애 같은 사람아, 아직도 그대는 그러한 모든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경솔한 방랑자가 된 것은 도처에서 어린애 같은 익살과 웃음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 그래서 도처에서 사랑을 좀 받고 희롱을 좀 받고 감사를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생각하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크눌프는 잠시 명상한 후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제가 아직 젊었던 옛날의 일입니다. 왜 저는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 하고, 또한 옳은 사람이 못 되었을까요? 그 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눈이 잠시 멎었다. 크눌프는 발을 멈추고 모자와 옷에 쌓인 눈을 털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신이 산란하고 피로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신은 지금 그에게 더욱 가까이 나타났다. 그의 밝은 눈은 더욱 크게 뜨이고 태양과 같이 빛났다.
"자, 이젠 만족하라."
신은 충고하였다.
"이제 탄식한들 무엇 하리오? 모든 것이 좋았고, 올바르게 진행되어 달리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신사가 되고 공장의 주인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 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고 싶단 말인가? 그런 신세가 되더라도 자네는 곧 달아나 숲 속에서 여우 곁에 자거나 새장을 놓거나 도마뱀을 키우는 짓을 할 것이 아닌가?"
크눌프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피로에 지쳐 몸이 비틀거렸으나,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신의 말에 감사하며 수긍하였다.
"보라!"
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대 속에 있던 내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사랑을 받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分身)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맛보고 겪은 괴로움은 모두 나도 같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크눌프는 대답하며 머리를 정중히 숙였다.
그는 눈 속에 누워 쉬었다. 피로한 수족이 퍽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눈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좀 잠들려 하였으나, 신의 음성이 그대로 들려 왔다. 그리고 신의 밝은 눈이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젠 더 한탄할 것이 없는가?"
하고 숨은 신의 음성이 물었다.
"이젠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눌프는 수긍하며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될 대로 되었는가?"
"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수긍하였다.
신의 음성은 점점 희미해지며 때로는 어머니의 음성같이, 때로는 헨리에트의 음성같이, 때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리자베트의 음성같이 들려 왔다.
크눌프는 다시금 눈을 뜨려고 하였으나, 해가 비쳐 곧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양팔에 무겁게 쌓인 눈을 털고 싶었으나, 이제 와서 다른 어떤 의욕보다도 자고 싶은 의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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