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해 김씨다. 족보를 보니 가야의 김수로왕의 72대 손이다. 김수로왕이 인도 여자인 허황옥과 결혼했다는 설이 있는데 정말인지는 확실히 모르나 김해 김씨는 대체로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람이 많다. 더 놀라운 것은 허황옥이 삼국시대에 복음을 전해주었다는 설까지 나온다는 사실이다.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각기 선교지역을 분담받을 때, 도마는 파르티아(Partia), 안식국(安息國), 현재의 이란과 인도 지방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AD 46년에 인도를 향해 가던 중 에뎃사(Edessa)에 머물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니, 에뎃사는 도마의 동양 선교의 전초기지요, 선교본부가 된 셈이다. 에뎃사의 위치는 유브라테스(Euphartes) 강 상류 서안, 안디옥 동방 약 24km 지점에 소재하는 작은 도시인데, 고대 이름은 우루하이(Urhai)였고 BC 300년 경부터 에뎃사는 로마의 위협을 받다가 AD 216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지금의 시리아 동북부 지역이다.
초대교회 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저서 ‘초대교회사’(4세기말에 편집)에 의하면 ‘아라이의 교의(敎義)’가 있는데, 당시 에뎃사 지배국 왕 아부갈 우가마(Abgar Ukam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로마 대관(大官) 사비뉴스(Sabinus)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일행 중 한난(Hanan; 왕의 비서관)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친히 뵈었고, 여러 가지 표적 행하시는 것과 가르침을 친히 듣고 귀국 후 국왕에게 그 사실들을 보고 하였다. 왕은 다시 한난을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예수님을 정식 초청하였다고 한다(이 사실은 요한복음 12:20-30 어간에 기록된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면회를 요청하고 자기네 나라로 모셔 가려고 하였던 사실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 초청에 대하여 “그대가 나를 만나본 일도 없는데 나를 신뢰하는 일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갈 수 없으나 나 대신으로 제자 중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병을 고쳐주고 나라의 축복을 빌겠다”라고 회신과 아울러 보낸 사도가 도마라고 한다. 아마 국왕이 와병 중에 있어서 특별히 예수님을 초청했던 것으로 본다. 한난은 마침 화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초상화로 그려 갔는데, 그 그림으로 왕의 병을 위시하여 많은 병자가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렸다고 믿었다.
또 다른 사료에 의하면 도마가 에뎃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 12사도 중의 하나인 다대오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아라이의 교의’의 주인공인 아라이는 다대오라는 것이다. 에뎃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페르시야에 널리 퍼져서 114년 경에는 기독교가 페르시야 전역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들 중에 도마가 인도와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복음의 창시자로 보는 예가 발견된다. AD 3세기에 활약했던 도로테우스(Dorotheus) 감독은 도마가 파르티아, 미디아, 페르시아, 로마, 박트리아 사람과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인도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카르미나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했다.
AD 5세기 말엽 성 제롬(St. Jerome)은 말하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부활후 40일 간 사도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와 같이 아버지 품에 있어 천사들과 함께 하고, 그는 도마와 같이 인도에,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바울과 같이 이탈리아에, 디도와 함께 그레데에, 안드레와 함께 아가야에, 그리고 모든 사도들과 더불어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언제나 함께 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13세기 교회사가 발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는 “우리 주 예수님의 승천 2년 후에 도마가 동방에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인도에 이 복음을 가지고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18세기 동방문헌의 편찬자 아세마누스(Joseph Simon Assemanus)는 야곱파의 시리아 교회가 옛날부터 성 도마를 추모하여, 그는 또한 인도의 최고의 전도자로 인정되었다고 단언하였다.
남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교회 전통에 따르면 처음으로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해안에 있는 마드라스(첸나이)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점차 서쪽으로 옮겨 말라바르에 정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대개 말라바르에 전도한 시기를 AD 50년, 또는 57년으로 본다. 그는 중국 칸바릭(Khan-barig; 현재의 북경)까지 전도했고 몇 군데 교회를 세우고, 다시 인도로 돌아와 마일라풀(Mailapur; 오늘날 마드라스 지방)에서 전도를 계속했다고 본다. 결국 그는 미워하는 이교도 원주민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순교한 연대는 AD 72년으로 보고 있다.
말라바르 교회가 쓰고 있는 기도일과서 안에 ‘성도마 제식문’이 있는데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성도마를 통하여 우상숭배가 잘못이라는 것이 인도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성도마를 인하여 중국 사람과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성도마로 인하여 생명에 관한 교리의 광명이 전 인도에 퍼지게 되었다. 성도마로 인하여 하늘 왕국이 저절로 날개를 펴서 중국에까지 가게 되었다.”
말라바르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도 도마에 관한 구절이 발견된다. “인도 사람, 중국 사람, 페르시아 사람, 그리고 해도(海島)의 모든 사람들, 또 시리아, 아르메니아, 자바, 루마니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도마를 추모하며, 그 이름을 높이어. 아! 그대는 우리를 구원한 자라고.” 이같은 전통에 입각하여 말라바르를 중심한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도마가 인도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수로의 부인인 허황옥이 이미 인도에서 도마에 의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야에 복음이 들어왔고 따라서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이미 삼국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한세대 교수인 김성일 장로다. 허황옥이 불교의 옷을 입고 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분명히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절을 짓고 불교의 일파처럼 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인도인 허황옥도 그리스도인이란 말인가? 만일 김성일 장로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복음을 접한 것이 된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허황옥이 가야에 도착한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존하여 AD 48년 7월 27일로 본다. 김수로왕 역시 인도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충남대 도수희 교수인데 그는 백제어를 40년이상 연구했다. 그는 김수로왕이 허왕옥과 대면했을 대 통역을 끼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했으며, 허황옥이 언제 어디서 올지 김수로왕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인도의 같은 지방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는 백제어를 연구하면서 김수로 이전의 삼한의 원주민들도 인도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손꼽히는 언어학자인 김진우 교수의 입장에 따라 허황옥의 고국인 아유타(Ayutta)는 힌두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아요댜(Ayodhya)시(市)로 추청했으며, 이 도시가 AD 20년 큐샤나(Kushana) 군에 의해 함락당하자 많은 시민이 태국으로 이민하여 방콕의 북쪽 50마일 지점에 지금의 아유타야(Ayuttaya)라고 불리는 신도시를 건설했다고 본다. 여기서 허황옥이 가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김병모 교수는 자신이 김해 김씨라고 밝히면서 인도인들이 결국 김해 김씨의 조상이 때문에 김해 김씨는 얼굴이 까무잡잡하다고 한다. 그 역시 허황옥의 출신지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허황옥은 아유타국 공주였는데 아유타국은 옛날 갠지즈 강에 있던 도시국가였는데 수로왕은 성이 김씨인데 아유타국 공주와의 사이에서 자손이 많이 나서 오늘날 수백만명에 이르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실제 인도에는 김해 김씨 문중에서 허황옥의 출신지를 찾아서 비석을 세운 일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가락국의 국기(國旗) 또는 문장(紋章)은 물고리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쌍어문(雙魚文)인데 이것이 인도의 아유타국 옛 땅인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병모 교수는 삼국사기에 허황옥의 시호가 보주(普州) 태후로 되어 있어 보주를 찾아보았더니 인도 땅이 아니라 바로 중국 사천성 안악의 옛 이름이 보주라며 여기서 후한 시대 AD 48년 경 중국 정부에 대해 반란이 일어나 반란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강하(江夏, 오늘날의 무창)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바로 허황옥도 그 반란을 주동한 집안의 한 여인으로 본다. 보주와 강하에서 쌍어문과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는 더욱 확신을 얻었다. 허황옥은 AD 32년 생인데 기마민족 연합집단인 박트리아가 북으로부터 아요디아를 침입했을 때 아요디야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BC 165년), 이때 허황옥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 즉 아유탸국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요디아를 떠난 허씨 일족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인도 서벵골주와 아삼 지방, 방글라데쉬를 거쳐 당시의 대리국(代理國, 현재 중국의 운남성)으로 갔다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역에 계속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국 일본까지 이 남방계 사람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며 계속 쌍어문이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것과 연결시켜 자신의 주장을 편다.
삼국사기에 의해 허황옥이 자신이 있던 곳에서 떠난 것을 5월로 본다. 가야에 도착한 것이 7월 말로 되어 있으므로 2달 반 전에 떠난 셈이고 허황옥이 있던 지역에서 2달 반 정도의 여행을 통해 가야에 도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도수희 교수는 김병모 교수처럼 중국 강하에서 출발했다면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으며 분명히 인도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또 그가 이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허황옥이 ‘뱀이 옆구리를 두른 부처’를 가져왔는데 이런 것은 중국 불교 계통의 것이 아니라는데 근거한다. 그래서 도수희 교수는 방콕 근방의 아유타야(Ayuttaya)라는 도시에서 허황옥이 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의 입장을 따르든, 도수희 교수의 입장을 따르든 김성일 장로의 입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어떻게 보더라도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한 것이 최소 AD 50년 내지 57년이기 때문에, 허황옥이 AD 48년에 방콕 근처의 아유타야(Ayuttaya)에서 출발했건, 아니면 중국의 강하에서 출발했건 그 허황옥은 도마에 의해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황옥에 의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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